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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단순 생활자(황보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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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생활자(황보름 저)

 

 

 

얽히고설킨 관계에서 떨어져나와 가벼워진 몸과 마음이 되어본다.
나는 혼자고, 나는 자유롭다고 감각해본다. 
단 한시간이라도, 단 하루라도 가벼운 상태가 되는 것. 
이 상태에서 꼭 해야하는 일이 아닌 내가 좋아하거나 하고 나면 기분 좋은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찾은 휴식이었다. 

 

 

 

 

Prologue

나와 결이 비슷한 작가의 에세이는 언제나 반갑다.

덕분에 주말 캠핑이 더 꽉차게 느껴졌다.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게 되면 책을 덮는 순간, 얼른 새로운 책을 읽고 싶어지곤 한다. 

책을 읽는 즐거움을 한 시도 멈추지 않고 이어가고 싶으니까.

하지만 그 성급해진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잠시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몇 구절 적어보는 것으로 지난 주말 읽은 책의 즐거움을 다시 한번 느끼려고 한다. 

 

 

 

34p

무턱대고 책을 쓰기 시작한 나는 작가들을 열심히 흉내 내며 방에 제대로 틀어박혔다. 사람 대신 내 생각과 감정을 붙들고 대화하는 방법을 익혀나갔다. (...) 혼자 있는 것도 좋고, 혼자 있는 시간에 하는 일도 점점 좋아졌다. 글을 쓰는 일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방에 홀로 앉아 나는 문장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다 고치고 바라보다 고쳤다. 고치면 고칠수록 문장은 나아진다는 걸 배워갔다. 그렇다고 영원히 고치고만 있을 수 없기에 적당한 때 만족해야 한다는 것도 배워갔다.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거북목을 한 채 문장을 고치다 보면 글쓰기는 재능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좋았다. 그보다는 누가 누가 오래 참나의 문제였다. 누가 한 번 더 고칠 것이냐, 누가 혼자 있는 고독을 끝내 견뎌낼 것이냐의 문제. 

 

 

 

85p

소설을 쓰던 초반, 나 역시 장면을 쓸 때마다 신기해하던 기억이 났다. 이게 되는구나, 하는 느낌. 머릿속에 흐릿하게 떠오른 이미지가 하나의 인물로, 인물의 행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이 신기했다. 특히 두 인물이 대화를 하며 알아서 이야기를 진전시킬 땐 쾌감마저 느껴졌다. 

 머릿속 장면을 글로 옮겨놓으면 나의 부지런한 뇌는 다음 장면을 내게 보여주었다. 보여준 대로 쓰다 보면 인물이 나도 예상 못한 말을 하거나, 순간의 우연한 선택으로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이야기가 마치 생물처럼 느껴졌다. 고정되어 있지 않고 매 순간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때 나는 소설을 쓴다기보다 이야기를 쓴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쓴다, 라고 생각하면 '대한민국 문단' 관련한 복잡다단한 기준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내 글쓰기의 목표는 '등단'이 되어야 할 듯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이미 '삶을 향한 여정'을 떠나고 있던 터라 '등단을 향한 여정'을 이중으로 떠날 여력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소설이란 단어는 뒤로 물리고 이야기란 단어를 앞세웠다. 이야기를 쓴다, 라고. 

 이야기를 쓴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 이야기를 보고 읽는다는 건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는 일이었다. 그렇게 따라가며 그들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간혹 그들을 너무 깊이 이해한 나머지 울고 싶어진다거나, 실제 울거나 고통스러워지는 일이었다. 이야기를 깊은 접촉이라 할 수 있을까. 피부의 접촉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접촉. 이렇게 접촉이 일어난 인물은 그들이 영상 속에 있건 책 속에 있건 내가 만난 사람이 되었다. 결과가 어찌 될지는 몰라도, 나도 이런 인물을 그려보고 싶었다. 독자와 접촉하게 되는 인물을.  

 

 

 

127p

한 걸음, 한 걸음. 걷기는 결국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고, 무엇보다 내 두 발로 나아가는 일이라서 완벽히 나에 속한다. 그래서 좋다. 걷다 보면 툭툭, 발소리도 나고, 착착, 리듬도 만들어진다. 내가 만드는 리듬에 익숙해져 걷다 보면 내 리듬 사이사이로 다른 사람의 리듬이 끼어들기도 한다. 자주 일은 아니지만 산책자에게 드문 일은 아니다. 착착, 척척, 착착, 척턱. 낯 모르는 이들과 앞뒤로 리듬이 엮인다.(...) 걷기 하면 떠오르는 구도, 순례의 이미지도 나를 걷는 삶으로 이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삶이 잘 사는 삶인지 알고 싶다는 바람이 한 걸음, 한 걸음이 된다. 걷다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깨닫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내가 찾고 있는 것이 실은 내 안에 있어서 그것이 걷기를 통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물론 호수 공원 한 바퀴의 걷기가 나를 대단한 깨달음으로 데려가주지는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매일의 걷기가 적어도 내가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지는 잊지 않게 해준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건, 오늘보다 나아진 내일의 나. 

 걷다 보면 이유 없이 황홀한 감각이 몸에 차오르곤 하는데 그날도 그랬다. 벅찬 기쁨이 나오길 잘했다는 셀프 칭찬으로 이어졌다. 걸을수록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252p

모든 삶에는 저마다 방식이 있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방식을 스스로 일굴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그즈음 생각했겠지. 나도 내 삶의 방식을 일구고 싶다고. 

 하지만 어떤 식으로 일구어야 할까. 알 수 없어서 언제나처럼 다른 삶들을 흘긋거리다 보면 유독 가슴이 반응하는 삶들이 있었다. 조용하고 단순하게 흘러가는 삶들이었다. 겉치레 없이 눈앞에 놓인 일과에 집중한 삶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일상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는 듯 했다. 그 질서를 따라 삶을 단순하게 다듬어가는 모습을 보다 보면 문득 생각하게 됐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 그러다 어떤 삶을 보면 가슴이 반응하고 시선이 멈췄다. 오래도록 보고 싶어서. 

 내가 반응하는 삶들엔 하나같이 할아버지가 곧게 편 몸으로 하는 줄넘기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일주일에 세 번 공원에 나가 줄넘기를 하자, 줄넘기를 할 땐 쉬는 시간을 갖자, 중간에 그만두지 말고 몸이 허락하는 한 계속 하자. 할아버지가 마음에 새겼을 '작은 약속'이 만든 순간들. 

 자기만의 약속을 지켜나가며 차근차근 하루를 가꾸는 삶들에선 여유가 느껴졌다. 자기 삶에 필요하지 않은 것들에서 과감히 고개를 돌린 후, 해야 할 것들에만 관심을 둔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독립을 하며, 유독 시선이 머물던 삶의 모습들을 자연스레 내 삶에도 구현해보고자 했던 것 같다. 닮고 싶은 마음을 듬뿍 담아 내 삶도 가능한 한 단순하게 일구어 나갔다. 요리, 걷기, 운동 같은 작은 약속들을 지켜나가면서. (...)

 단순한 생활이 좋은 건,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깃든 생활이라서다. 내 삶과 동떨어진 것들이 아닌, 내 몸과 마음에 밀착된 매일의 일과에 의미를 부여하며 시간을 쓰는 생활. 이런 생활을 보내다 어느 날 뚜렷이 느끼게 되는 삶에 대한 만족감. 나는 이런 만족감을 느끼며 살고 싶었고, 지난 1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러면 된 것 아닐까. 누군가가 멈춰서 눈여겨볼 일상은 아니지만, 나의 에너지와 몸과 마음이 서로 호응하며 만들어낸 일상은 오롯이 나의 일상이었다. 

 

 

 

다음에 읽을 책으로는 황보름 작가의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로 일찌감치 골라놓았다. 

좋아하는 것들과 삶의 방식이 비슷한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는 황보름 작가의 소설이 문득 궁금해졌다. 

퇴근 후 먹고, 씻고, 깨끗하고 가벼운 몸으로 침대에 들어가 좋아하는 책을 읽는 상상만으로도 오늘의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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